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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통치 기구였던 조선총독부입니다. 실제 건물이 있던 경복궁 바로 앞에
KBS가 당시 모습을 증강현실로 재현했습니다.
조선과 조선 왕실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에 총독부를 세워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고,
일제의 지배력을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3.1운동 계보도'를 KBS가 일본 현지에서 최초 발굴했습니다.
일본 외무성이 생산한 문서 자료가 한데 모여 있는 외교사료관.
3.1운동 이후 경계심이 한층 높아진 일제가 밀정을 활용해
촘촘한 감시망을 마련한 흔적이 공문서로 포착된다.
취재진은 일본 공공기관뿐 아니라 분야별로 전문화된 고서점에서도
3.1운동과 밀정 관련 자료를 수개월 동안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도쿄의 한 고서점에서 이른바 '3.1운동 계보도'를 찾아냈다.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140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계보 형태로 그려져 있다.
천도교를 이끌었던 손병희 선생을 맨 위로 놓고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측 인사들이 아래로 배치된다.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천도교 조직망이 각 지역 책임자들 이름으로 이어진다.
기독교계를 이끈 이승훈 선생을 시작으로 각급 주도자들을 거쳐,
6개 학교 학생운동 대표자들로 이어진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인 청년들을 이끈 사람들이다.
특히 정주조, 평양조, 의주조 등 북한 지역 목사들을 주축으로
3.1운동의 동력이 북쪽으로 전해진다.
이번엔 불교 한용운 선생.
"한용운의 명을 받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자들"이라는 설명과 함께
당시 배포 책임자였던 중앙학림생도의 이름이 나열된다.
백 명이 넘는 3.1 운동 주도자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계보도가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KBS는 전문가들과 함께 계보도의 구체적 내용을 검증하고 일본 외무성 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 계보도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걸로 확인됐다.
3.1운동이 조직화된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한편,
기존 사료에서 찾기 힘든 '3.1운동의 숨은 주역'들이 적잖이 포함됐다.
"3.1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들 가운데 묻혀 있는 분들이 많죠.
각 인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할 때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KBS는 3.1운동 계보도를 서울역사박물관에 제공해 3월1일 부터 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들불처럼 번진 3.1 만세 운동으로 당시 조선총독부는 크게 당황한다.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고문과 조사가 이어졌고,
경찰과 밀정들의 정보를 더해 3.1운동 전모 파악에 나섰는데...
이렇게 해서 총독부가 20여 일 만에 만든 게 바로 이번 계보도이다.
계보도에는 기존에 알려진 3.1운동 주역들보다 더 많은 140명이 등장한다.
이미 훈장을 받았거나 아니면 친일파로 변절해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역사적 평가를 마친 사람들을 제외하고 34명의 새로운 인물이 드러났다.
KBS는 "이 34명이 누구냐"고 보훈처에 질의해봤다.
그러자 "9명은 현재 독립유공자 심사가 진행 중이고,
10명은 친일 또는 월북 등 이상 행적을 보인 사람들로 파악하고 있다"는 답변이 왔다.
그래도 여전히 15명은 수수께끼로 남는다.
일제가 3.1운동의 주역이라고 파악했지만 우리 정부 기록에는 없는 이 15명은 누굴까?
백 년 전의 기록을 토대로 KBS는 지난 2달에 걸쳐 이들의 흔적을 추적했고,
일부이지만, 의미 있는 사실을 찾아냈다.
전문학교 학생대표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된 주익 선생
보성전문학교, 현 고려대학교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자료보존고 깊숙한 곳에 보관된 졸업앨범, 빛바랜 앨범 속 주익 선생의 사진
생년월일과 본관 등 구체적인 정보를 찾아냈다. 후손은 어디에 있을까.
주익 선생의 본관인 신안 주씨 종친회를 찾아갔다.
주익이라는 이름 옆에 적힌 그의 활약상,
족보에 나오는 주익 선생의 아들과 손자, 증손주들.
이를 토대로 수소문한 끝에 부산에 후손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진짜 사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얘기로만 들었지."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란 오면서 호적 하나 챙기지 못한 가족들,
취재진이 가져간 사진으로 난생처음 할아버지를 뵈었다.
주익 선생이 학생대표로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고,
신간회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 이야기는 취재진을 통해 처음 들었다.
후손들은 취재진이 건넨 자료를 토대로 서훈을 신청해 보겠다고 말했다.
경기 이천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이강우 목사
계보도가 가리킨 이천중앙교회부터 찾았다.
그러나 전도사로 몸담았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당시 문서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지역 원로 장로로부터 이 목사의 후손을 찾아낼 실마리를 얻었다.
"30년 전 이강우 목사의 기록을 찾고 있던 가족으로부터 호적을 건네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자료를 좀 드리면 자기 아버지가 더 널리 선전될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가지고 내 집을 찾아온 거지."
"아버지 흔적을 찾은 거 같은 게 기쁘더라고. 아버지하고도 일찍 헤어졌어요,
우리가... 저기 독립운동 한다고 맨날 돌아다니고..."
호적에 나온 정보를 토대로 막내딸 이경애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리움은 여전했다.
이외에도 KBS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조사한 결과, 15명 가운데 일부의 흔적을 찾아냈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대표인 김문진 선생은 대구지방법원의 조사를 받았고,
함경도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다 숨진 사실을 확인했다.
충남 홍성에서 3.1운동을 이끈 김병제 목사는 목회활동을 이어가다 광복 직후 숨졌고,
중앙학교 생도였던 장기욱 선생은 신간회와 조선 공산당에 참여해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3.1운동 밀서를 평북 의주 책임자에게 전달한 송문정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했다.
3.1 운동의 주역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는 지난해
"행적이 일부 입증되지 않더라도 친일 활동 등의 명백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서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관련 규정을 바꿨다.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 한 명, 한 명을 계보로 그렸습니다.
3.1운동으로 인한 위기감이 그만큼 컸고 갈수록 탄압의 강도는 높아졌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총독부 건물은 꽤 오랜 시간 살아남았습니다.
1996년, 광복 50년이 넘어서야 총독부 건물은 철거됐습니다.